로버트 카파 멕시칸 슈트케이스
멕시칸 슈트케이스

로버트 카파는 전설적인 전쟁사진가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촬영한 ‘스페인 병사의 죽음’은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줌과 동시에 전쟁사진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처음 사진이 소개된 뒤로 지금까지 이 사진은 끊임없이 연출 논란에 휩싸여 왔다. 전쟁터의 병사가 너무 깨끗한 셔츠를 입고 있다는 점, 총상으로 쓰러지고 있음에도 포탄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 의심의 이유는 제법 설득력이 높았다. 포토저널리즘의 진정성 자체가 흔들릴 만한 이 중대한 사건의 실마리는 오직 촬영 당시의 연속 장면을 담은 필름만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필름은 오랫동안 분실된 채로 있었다.
스페인 내전 촬영 후인 1939년 헝가리계 유대인인 카파는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해 오자 급하게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당시 암실을 관리하던 사진가이자 동향 친구였던 치키의 회고에 따르면, 치키는 스페인 내전에 관한 필름과 서류들을 배낭에 넣은 채 항구를 찾아가다가 길에서 만난 칠레인에게 무조건 칠레 영사관에 맡겨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나치수용소에 갇혔던 치키가 풀려나왔을 때 필름의 행방은 찾을 수는 없었다. 1922년 파리역에서 도난당한 헤밍웨이의 원고처럼 이 필름은 사진계의 잃어버린 성배로 통했다. 1975년 베트남전 촬영 도중 지뢰를 밟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로버트 카파는 이 필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스페인 내전 때 세상을 떠난 여인이자 동료 게르다 타로, 함께 매그넘을 창립한 데이비드 세이무어의 필름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에 로버트 상심을 훨씬 깊었다.
이 필름의 존재가 드러난 건 꼬박 반세기가 지나서다. 1995년 멕시코 영화제작자인 타르베 는 우연히 숙모의 유품 속에서 문제의 필름을 발견한 뒤 뉴욕대 퀸즈칼리지에 있는 제랄드 교수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그 대학이 후원한 스페인내전에 관한 사진전을 보고난 후 필름이 보다 유용하게 쓰일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뒤였다. 제랄드 교수는 로버트 카파의 동생인 코넬 카파와 친구였고, 코넬은 이미 형을 기리기 위해 뉴욕에서 국제사진센터를 설립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필름의 행방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필름이 곧바로 국제사진센터로 옮겨온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지배를 겪었음에도 스페인 내전 당시 수많은 난민을 조건없이 받아들였던 멕시코 입장에서는 그 필름이 멕시코에 머물러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 코넬 카파에게 그 필름은 자신이 물려받아야 하는 형의 유품이었다. 타버는 그 사이에서 필름의 영원한 안식처가 어디여야 할지에 대한 외교적 윤리적 갈등을 했다. 필름의 실체는 공개되지 않은 채 덧없는 동시에 초조한 시간이 지나갔고, 마침내 2007년 12월 필름이 국제사진센터에 전달되었다. 타버는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멕시칸 슈트케이스는 4300컷 필름이 담긴 종이 상자다. 멕시칸 슈트게이스는 엄밀하게는 이 상자들을 담았던 최초의 여행 가방이지만, 이제는 이 사건 전체를 일컫는 이름으로 통하기도 한다. 이 필름이 어떻게 해서 영화제작자의 손에까지 전해졌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다만 그의 숙모의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근무한 외교관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암실을 빠져나온 필름이 항구에서 누군가에 의해 이 외교관에게 전달되었으리라고 짐작될 뿐이다. 국제사진센터는 이 필름들을 정리해 올 봄 뉴욕에서 첫 전시를 시작으로 현재 유럽 순회전을 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스페인 병사의 죽음’과 관련한 필름은 애석하게 멕시칸 슈트케이스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과 허구가 헛갈릴 만큼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재능을 발휘했다는 로버트 카파는 오히려 영원히 잠든 성배와 함께 더 큰 신화적 인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