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순철 작가론 - 시선의 선회
시선의 선회-호기로운 시선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시각적 반전
분명 익숙한 장면은 아니다. 건장한 흑인 남성과 이지적인 백인 여성, 그 사이에 앉은 금발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피부색과 이목구비가 다른 인종의 차이, 건조한 표정, 절제된 인테리어 등 사진을 채우는 모든 요소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가족 사진하곤 거리가 멀다. 심지어 사진 속 누구도 웃지 않는다. 꾸며 낸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낯선 광경은 현실 세계 어딘가에서 얻어진 것이 분명하다.
처음 느꼈던 생경함을 걷어내고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가족 사진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여자의 어깨에 걸친 남자의 손, 어른 한가운데 놓인 아이 중심의 자리 배치, 소녀의 무릎에 포갠 남녀의 손을 보면 가장 전형적인 가족 사진의 포즈다. 충직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린 불마스티프에게 시선이 미치면 주저 없이 완벽한 중산층 가정임을 확신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도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진 속 인물들과 쉽게 친해질 수는 없다. 이 생경함이 단순히 피부색이 다른 인물들의 조합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적 편견 때문인지, 아니면 촬영, 조명, 프린트까지 작가가 미학적으로 의도한 세련된 형식미 때문인지 헷갈린다. 그나마 이 사진은 덜 난감한 편이다. 알몸의 흑인 사내가 자기보다도 덩치가 큰 알몸의 백인 여성을 안아 든 욕실 장면은 정황은 분명 열애인데 상당한 파격이다. 젊은 연인의 욕실 장면은 좀 더 로맨틱할 거라는 통념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작가가 들이미는 과감한 시각적 반전에 그만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들 사진은 다른 인종끼리 사랑에 빠진 남녀나 동성애 커플을 다룬 변순철의 <짝패> 연작이다. <짝패>와 마주했을 때 생기는 혼돈은 일단 커플들이 취하는 무심한 표정 혹은 도발이다 싶을 만큼 자연스러운 포즈 탓이다. 카메라를 노려보는 듯한 당당한 시선, 어떤 감정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한 무표정은 마치 공포 영화의 포스터처럼 보는 이를 긴장시킨다. 마치 들여다보는 사진의 앞뒤로 어떤 사건이 전개될 것만 같은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 속 인물들은 성적 소수자라 할지라도 아웃사이더처럼 보이지 않고 상당히 비중 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평상시 변순철은 다이안 아버스에게 받은 영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학을 중단하고 유학길에 오른 늦깎이 학생으로서 서툰 영어, 빠듯한 학비, 숫기 없는 성격 때문에 모든 것이 서럽던 시절, 일 삼아 거르지 않고 들르는 서점에서 너무 우울하다고만 생각했던 다이안 아버스의 작업과 다시 조우했다. 강렬하면서도 가식 없이 인물들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 앞에서 마치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청년인 양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한다. 오브제 사진을 찍는 멜랑콜리한 젊은 작가가 인물 사진을 찍는 작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변순철이 해안가나 공원 등지에서 초기에 촬영한 흑백 인물 사진을 보면, 강한 조명이라든지 과감한 클로즈업 혹은 순간적인 심리 묘사에 충실한 다이안 아버스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짝패>는 다이안 아버스처럼 직설적이지 않다. 다이안 아버스의 작업이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겪는 생의 부조리함을 그로테스크하게 다룬다면, <짝패>의 커플들은 피부색만 이질적일 뿐 스스로 사랑의 대상을 선택한 능동적 삶의 주인공이다. 물론 <짝패> 시리즈에서도 이 능동성은 인물의 연령대에 따라 질감을 달리한다. 젊은 커플에게서 드러나는 왠지 모를 불안과 우울함이 아이를 입양한 게이 커플이나 아프리카 추장의 아들과 가정을 이룬 유엔 대사의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혼혈 가족들을 무턱대고 섭외하면서 시작된 <짝패>는 젠더, 인종, 문화 혼혈 등의 주제를 건드리기는 하지만 단순히 아웃사이더의 관점만 담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비주류라고 느꼈던 작가 자신이 투사되어 있다. <짝패> 속 인물의 시선은 작가와 관객을 향하는 타자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변순철의 시선을 대리한다. <짝패> 속 커플들이 주류 세계와 맺는 긴장감은 곧 작가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설정한 스스로의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외상의 재현
사진 속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변순철의 태도를 읽어 내는 일은 ‘왜소한 동양 남자’ 변순철이 어떻게 욕실에서 흑인과 백인 커플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라는 속물적 호기심에도 답을 준다. 린호프 카메라와 커다란 조명을 짊어진 채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3년에 걸쳐 70여 쌍을 촬영한 <짝패>의 촬영 후기는 변순철이 다이안 아버스가 아니라 경계와 비경계의 갈림길에 놓인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 속 인물에 더 동화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는다. 그는 스스로 다이안 아버스를 동경하는, 다이안 아버스의 작품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짝패>는 변순철이 사진 밖에서 경험한 외상을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짝패>가 보여 주는 대상들의 냉정한 시선, 실물 크기의 프린트 방식 등이 그를 왜소하게 만드는 물리적 심적 세계를 막아 내려는 방어기제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변순철은 죽음과 마주한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다. 이등병 시절 불이 난 막사 지붕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꼬박 1년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것이다. 사진집을 만나면서 작가를 꿈꾼 것도 평생 사람 구실 못 할 수도 있다는 진단에 막막하기만 하던 그 시기였다. 그 후 뉴욕 유학 시절, 옆집에 난 불이 그의 집까지 옮겨 붙어 또 한번의 아찔한 순간을 넘겨야만 했다.
두 차례의 화마로 생긴 두려움은 2003년 뉴욕에서 입던 셔츠들을 태우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가 유학 시절 내내 걸치고 다닌 서너 벌의 큼직한 셔츠는 궁핍, 외로움, 방황, 죽음처럼 잊고 싶은 상처의 실체였다. 따라서 셔츠를 태우는 작업은 외상을 치유하려는 작가의 의식이자, 그 셔츠를 걸치던 시절과 그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하는 상징적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내놓은 인물 작업인 <eye to I>는 앞에서 말한 일련의 경험들을 거치고 난 변순철의 태도가 한결 여유로워졌음을 보여 준다. 불확실한 시기를 살아가는 20대 한국 청년을 찍은 <eye to I> 연작은 젊은 세대의 자기 정체성을 묻고 있다. 그러나 <짝패>처럼 인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변순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바위 하나를 동일한 촬영 장소로 삼고,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 또한 완전히 배제하는 전략을 취한다.
촬영 배경으로 쓰인 바위가 딱히 의미하는 것은 없다. 그보다는 인물들이 각자의 밀실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왔다는 점이 더 중요해 보인다. 엄밀하게는 인물들의 몸을 빌려 작가가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왔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제 일관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렌즈는 대상에서 멀어진 채 고정되었다. 작업 속에 등장하는 혜림도 동길도 정규도 작품 설명에서는 각자의 이름으로 호명되지만, 중립적인 변순철의 시선은 이들을 개인이 아니라 20대라는 집단 속의 익명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나에게 이르는 시선’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연작의 제목이야말로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겠다는 은유를 담았지만, 그런 점에서 이 제목은 오히려 <짝패>에 어울리는 듯 보인다. 작가는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우기자면 이 제목은 <I to eye>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이제 변순철은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는 시선의 변화와 함께 작업 대상도 확장되었다. <eye to I> 이후에 시작된 <Conceptual Foam>은 인물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탐구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리드와 패턴이 만들어 내는 조형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조형성에는 장소나 물질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착시 효과도 포함된다. <eye to I>에서 배경을 최소화한 채 인물에 집중했다면, <Conceptual Foam>에서는 인물을 배제한 채 공간에만 집중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질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변순철이 무표정한 인물의 표면을 통해 그들의 심리와 분위기를 읽어 내듯이, 인물 없는 텅 빈 공간 또한 무표정한 대상이다. 따라서 대상을 중립적으로 보기 시작한 변순철에게 ‘표정 없는 표정’ 뒤에 숨겨진 시각적 긴장감을 끌어낸다는 점에서는 공간이든 사람이든 대상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타자에게로
변순철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세 번째 인물 작업인 <전국노래자랑>에서 더 분명해진다. 텔레비전 장수 프로그램의 촬영 현장을 찾아다니며 우승자를 기록한 이 작업에서 인물들은 훨씬 자유분방한 포즈로 우승의 기쁨을 드러낸다. 작가는 <짝패>나 <eye to I>에서 보여 준 치밀함 대신 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를 바꾼다. 작가의 소극적 개입은 군이나 읍 단위 녹화 방송 현장에서 촬영하는 게 수월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촬영 대상인 우승자도 녹화가 끝나고서야 즉석에서 섭외해야 한다. 그러나 작가 또한 용의주도하게 접근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싫어하지 않는 듯 보인다. 마치 연애의 주도권을 넘겨 준 사람처럼 인물이 이끄는 대로 상황을 따라간다.
<전국노래자랑>의 인물들은 도회스럽지 않다. 화려한 생활한복을 걸쳤지만 신발만큼은 검정색 ‘국민 단화’를 신은 할머니라든지, 온통 흰색으로 ‘깔맞춤’을 한 할아버지의 부자연스러운 검정 벨트처럼, 저마다 최고의 멋을 부렸지만 어딘가 모를 어설픔이 풍겨 나온다. 결국 <전국노래자랑> 속 인물들의 복장과 포즈는 노래자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기호인 셈이다. 그래서 이 튀는 복장은 우리가 그들과 동화되지 못하도록 일정한 거리를 만들어 낸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화려해지는 패션, 과장된 제스처는 노래자랑 우승자들의 실제 모습이지만 그들의 실재를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이 인물들을 탄생시킨 사회적 맥락 속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변순철이 그의 작업을 통틀어 처음으로 등장시킨 군중까지도 인식하게 된다. 마치 곡마단처럼 전국을 돌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는 이 장수 프로그램은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비주류 인생의 욕망을 약간은 ‘촌스러운’ 방식으로 실현시켜 주는 소박한 카니발인 셈이다. 그 카니발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상대역인 군중도 필요했던 것이다. 변순철의 시선은 이제 스케일도 커졌다.
<짝패>가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온전히 내보이면서 심리적 정체성에 대한 교감의 틀을 마련했다면, <전국노래자랑>은 사생활 밖에서 분출되는 욕망의 사회적 단면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려던 뉴욕의 변순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eye to I>보다도 더 중립적인 시선으로 노래자랑 우승자의 관찰자가 되어 군과 읍을 배회한다. 더불어 우리의 시선 또한 인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그 시선은 타자에게서 타자로, 혹은 그러한 타자들을 만들어 내는 사회라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짝패>에서 보여 준 변순철의 심리적 시선은 <전국노래자랑>에 이르러 사회적 시선으로 옮겨 갔다.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자신의 세계 안에서 세계 밖으로의 이동이다. 호기로웠던 시선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