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은 작가론 - 몸의 말문을 찾아서
몸의 말문을 찾아서
육화된 상처 상처가 깊으면 말문이 막힌다. 말이란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 존재하게 만드는 의미 망이지만 그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감정도 있게 마련이다. 몸으로는 분명 지각해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런 감정에는 다시 떠올리고 쉽지 않은 슬픈 경험들도 포함된다. 말로써 그 경험을 되새기는 일은 또 한번의 상처이기에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의 문을 아예 닫아 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닫고 싶지 않았으나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사이 말의 길이 메말라 버리기도 한다. 애초에 말로 툭 뱉어 낼 수 있다면 깊은 상처가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 존재하지만 말로써는 정착할 수 없는 상처들은 그렇게 제자리를 잃고 몸 안에 갇힌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그 상처는 더 집요하게 은근한 통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몸속에서 쥐 죽은 듯 숨어 있다가 반복하여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 상처의 꿈틀거림은 몸 밖에서는 형상화된 적이 없기에 다른 사람은 알 길이 없으며, 그래서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을 한없이 고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상처는 곧 몸의 일부여서 이 육화된 상처 없이는 자신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꽤 골치 아픈 일인데, 언어 밖에 존재하는 상처를 어떻게든 설명하지 않는 한 나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자기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말문을 닫게 만든 상처로 인해 다시 말문을 열어야 하는 역설이야말로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이 직면하는 운명이다. 한경은이 작업 초기부터 붙들고 있는 화두는 몸속에 갇힌 상처를 불러내어 마주하는 일이다. 말문을 통해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이 상처들을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가. 한경은은 상처가 박힌 몸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몸의 예민한 반응들은 단순한 신체 증상이 아니라 감정의 끈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초기작 ‘소리’(2008-2011)는 자기 몸에 처음으로 주목해 본 여성들의 고백이다. 여성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토르소를 드러낸다. 첫 숨길인 탯줄이 달려 있던 곳, 생명과 자궁의 거처인 이곳은 여성성을 가장 민감하게 자각시킨다. 쭈글쭈글하거나 수술 자국 등을 가진 민낯으로서의 이 육체는 살아오면서 겪은 신산함 그 자체이자 그 시간을 견뎌 낸 자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가장 은밀한 신체이며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셈이다. 한경은은 첫 작업부터 사진을 통해 피사체가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도록 유도하는데, 사진은 피사체의 독백을 도와주는 매개자 역할을 맡는다. 언어화하지 못한, 혹은 말하기 전에 들여다봐야만 했던 자기 몸의 중요한 일부를 사진이 거울처럼 투사해서 피사체에게 다시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한경은은 가부장 사회에서, 언어로 규정되는 제도권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타자로서의 여성에 주목한다. 본래 상처라는 것이 모든 형태의 폭력이 낳은 고통의 기억이라고 할 때, 이런 상처는 대개 주변부나 변방에 머무는 이들이 받는다.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여성은 단순한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상처를 훨씬 깊이 받고 민감하게 지각하는 모든 연약한 존재를 상징한다. 연약함이 나약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경은의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은 생이 곧 힘겨움인 이들이 자기만의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어머니의 항암 치료에서 비롯된 ‘묵정’은 생과 죽음이 한데 어울린 몸에 관한 성찰을 유도한다. 애초 한경은은 치료를 시작한 어머니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몸, 그 잉태로서의 몸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작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커다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한경은은 이 감정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동안 질병을 겪는 몸 또한 하나의 존재 그 자체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슬픔이나 상실, 고통 등의 수사가 육체의 질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덧입혀진 은유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고 나자 투병의 의미가 훨씬 투명해진 것이다. 그것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일 뿐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한경은은 어머니를 혈연 관계가 아니라 ‘명호’라는 이름을 지닌 여성으로 받아들인다. 서로에게 의지해 온 모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독립된 두 여성의 연대감이 더 깊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더불어 같은 병동의 수많은 ‘명호’씨에게 눈을 돌릴 수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병실 복도를 등지고 선 여성들의 초상 사진은 육체의 부자유스러움을 통해 상실감을 느끼는 한편, 그 상실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재발견하는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다. ‘묵정’의 주인공들은 동일한 배경에 동일한 포즈로 서 있지만, 두건이나 슬리퍼를 통해 저마다의 취향을 드러내며 결코 같을 수 없는 삶을 살아 낸 개별적 인물로 거듭난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의 동네 이름이기도 한 작품 제목 ‘묵정(墨井)’은 우물이 어두울 정도로 깊다는 뜻이지만, 여성의 몸이 지닌 깊은 존재감이자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에 서글펐던 짙은 상처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카메라 앞에 당당하게 선 이 여성들은 사진을 찍을 당시 그 맞은편에 서 있었을 작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진 속 주인공들의 담담한 포즈에는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어머니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한 한경은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나다 ‘묵정’을 통해 더 단단해진 덕분일까. 한경은이 그 이후에 보여 준 작업은 상처의 기억을 가진 개인이되 그 내면의 말을 듣는 데서 나아가 치유의 과정으로 확장된다. 치명적인 상처에 대한 기억이란 흐릿해지거나 각색될지언정 몸에 새겨진 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안한 ‘기억의 가소성’(2012-2013)이나 ‘Invisible Vision’(2015-)은 자신의 상처와 적극적으로 대면하려는 자발적인 참가자들과 협업한 것이다. 저마다 상처의 기억을 지닌 참가자들은 촬영에 앞서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혹은 ‘그날의 나에게’라는 주제 중 하나를 택해 글을 쓰도록 요청받는다. 아무런 제약도 없이 익명을 전제로 한 이 편지는 각자의 기억에 대해 비로소 말문을 열게 만드는 촉매제이자 촬영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도입부다. 이후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은 상처를 안은 자신의 내면과 정면으로 맞서는 의식이 되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듯이 카메라에 비친 나를 또 다른 내가 지켜본다는 것은 비로소 상처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의 시작이다. 육화된 상처는 몸의 주인만이 보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촬영은 그 자체로 예술 치료이자 참가자의 비중이 큰 행위예술이 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두 편의 시리즈는 초기작에 비해 연극성이 훨씬 강조된다. ‘기억의 가소성’은 참가자들의 상반신에 특수 분장을 하여 상처를 가시화한다.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주홍글씨처럼 마음속 낙인으로 남은 상처를 눈에 띄게 만듦으로써 상처와의 적극적 대면을 시도한다. 분장을 한 나는 낯설 수밖에 없다. 내면에 감춰 둔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살갗에 새기는 ‘기억의 가소성’과 달리 ‘Invisible Vision’은 장소성과 행위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 참가자들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에서 특별한 포즈를 통해 육체와의 교감을 시도한다. 실험극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이 작품은 낯설고도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동작이면서도 결코 전부를 보여 주지 않은 채 상황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서 장소와 포즈는 극대화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그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단서는 은폐되어 있다. 어떤 동작은 과감하고 어떤 동작은 서글플 정도로 아름다워서 상처의 이중성 혹은 기복이 큰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과감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가려진 이미지들은 답답함과 불편함을 유발하고, 결국은 이 행위가 드러내려는 기억의 불편함과 파편성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이런 작업을 통틀어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기’라 부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한경은의 모든 작업은 슬픔을 지닌 자신에게 다시 귀환한다. 생명을 낳은 몸이 죽음을 예감하듯, 그런 몸에서 한경은이 나왔기에 어머니의 경험이 곧 자신의 경험일 수밖에 없듯이 타인의 모든 상처는 한경은의 상처다. 상처를 안은 몸이 몸째로 말문을 열어 내야만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듯이 한경은에게는 사진 작업 자체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고 치유하는 과정인 셈이다. 삶과 죽음, 치유와 상처, 나와 너는 모두 뫼비우스의 띠처럼 달라붙은 한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작가는 늘 ‘타인’라는 말로 대상과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일까. 이 거리 두기는 ‘묵정’에서 어머니를 ‘명호’씨로 독립시키는 것과는 분명 다른 성격이다. 섣불리 누군가의 상처에 깊이 공감한다는 말이 또 다른 폭력이 될까 두려워 망설여지기 때문일까. 이런 윤리적인 이유가 전부라면 한경은의 작업은 그야말로 사진을 매개로 한 예술 치료의 과정으로만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경은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말문을 다 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관심을 갖는 대상, 여리고 상처받고 생채기를 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상처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이들은 모두 한경은이다. 그런데도 정작 작가는 ‘너는 나’라는 사실 앞에서 여전히 조심스러워 보인다. 타인의 상처를 인정하는 일은 곧 내 상처와의 동일시일 텐데 작가는 아직 자신의 상처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바리데기의 무가 작가가 ‘기억의 가소성’에서 밝힌 것처럼 몸이 한번 기억해 버린 상처는 지워지지 않기에 상처와의 동거는 영원한 숙명일 터다. 그렇다면 이 슬픈 몸의 사연을 작가는 왜 사진을 통해 대면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사진이 언어 밖에 놓인 감정들을 재현해 낼 수 있는 매개자 혹은 감정이 육화된 몸을 가시화할 수 있는 시각 수단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촬영이 가지는 의식의 의미가 더 클지도 모른다. 촬영 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사진의 일회성은 사뭇 제의적이다. 생의 한 순간을 붙박아 두는 메멘토 모리의 장치로써 사진은 생과 죽음의 경계, 몸의 안과 밖을 연결해 준다. 마치 깊은 슬픔을 달래려는 굿판처럼 작가에게 사진은 결과물보다는 피사체와 교감하는 촬영이라는 행위 자체에 비중이 실린다. 그런 점에서 사진을 통해 한경은이 시도하는 일련의 행위는 서사 무가인 ‘바리데기’를 연상시킨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바리데기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딛고 죽음의 세계까지 건너갔다 온다는 이 노래는 숱한 울음과 고통에 놓인 그늘진 세상을 거쳐 마침내 여성으로 성장한 소녀의 대장정을 그린다. 그래서 시인 강은교는 이 바리데기를 ‘바다를 일으키는 눈물을 지닌, 무덤을 가리켜 우는 여자’로 묘사한다. 이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달래는 굿판처럼 한경은은 숱한 울음을 우는 이들을 사진으로 달래는 영매자를 자처한다. 비록 울음은 그쳐도 울음이 남긴 얼룩은 지워지지 않으므로, 한 사람의 울음이 멈춰도 다른 이들의 울음이 다시 시작할 것이므로 한경은이 사진과 함께 떠나는 길은 멈추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먼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먼 길이 숱한 이들의 더듬거리는 말문을 열게 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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